Category Archives: JungDanChef’s Story

따뜻한 집밥 같은 하루를 위하여

어렸을 적 생일이 되면 반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했었습니다. 초대하는 선별 기준은 없었습니다.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내 생일인데 우리 집에 놀러 올래." 이렇게 한마디 하는 게 전부였습니다. 그때 당시 한 반에 60명이 넘었는데 초대로 우리 집에 온 아이들이 20명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였으니, 국민학교 2학년까지는 그렇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초대를 하면 엄마가 생일상을 차려 주십니다. 밥상 위에 어떤 음식이 있었고 무엇을 하고 놀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그 당시 막내아들 생일상 차려 주신다고 저희 어머니는 고생하셨을 것 같습니다.

저희 집 공주들을 보니 요즘은 생일파티를 한다고 집으로 부르는 경우는 없더라고요. 대부분 빕스 같은 패밀리 레스토랑에 소규모의 사람들만 불러서 밥 먹고, 노래방 가고, 보드게임방 가서 놀다가 집으로 돌아옵니다. 한 반에 친구 수가 줄어든 것도 있겠지만, 이제 집으로 사람을 초대한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 되어 버린 이유인 것 같기도 합니다.

풀무원에 입사를 하고 기장의 한 유리공장 구내식당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위탁을 받아 다른 회사 구내식당에서 일을 하다 보니 저의 소속은 항상 "을"이었고, "갑"의 눈치를 보면서 일을 했습니다. 회사마다 식당 담당자가 있는데 그 담당자의 성향에 따라 일이 편해지기도 하고 힘들어지기도 합니다. 기장의 유리공장은 이 담당자가 좀 까다로운 편이었습니다.

내 회사 상사에게는 꼿꼿하게 해도 이상하게 "갑"사 담당자 앞에서는 굽실거리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나이가 어려서 처세술이 어떤 건지 몰랐던 것 같기도 하고, 발령받은 첫날부터 식당 담당자의 위엄을 극도로 높여 이야기한 저희 회사 부장의 말에 선입견이 생긴 것 같기도 합니다.

기장의 흙시루라는 한정식집이 있습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 지역에서는 꽤 유명한 한정식집이었습니다. 식당 담당자와 회식을 할 일이 있으면 꼭 그 식당을 예약해서 식당 식구들과 가는데, 그 자리가 그렇게 불편할 수가 없었습니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한상 부러지게 나오는 음식들 맛을 한 번씩은 다 먹어봐야 하는데, 그 "갑"사 담당자 한 명 때문에 음식에 손을 뻗을 수 없었습니다.

회식을 마치고 나오면서 남기고 온 음식을 제대로 못 먹은 것이 어찌나 아깝던지. 지금도 그때 못 먹고 온 계란지단 예쁘게 올라간 잡채가 눈에 아른아른합니다.

음식은 어떤 음식을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누구랑 먹느냐도 중요합니다. 수십만 원짜리 스테이크보다 편한 사람과 먹는 김밥 한 줄이 좋기도 하고, 대학 때 지옥문 들어가는 것 같았던 혼자 밥 먹으러 구내식당 들어가는 것이 이제는 혼자 밥 먹는 게 더 편한 걸 보면, 세상도 나도 참 많이 변했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래서 그런지 아무렇지 않게 하는 "언제 밥 한번 같이 먹자."는 말은 최고의 인사말인 듯합니다.

언제 저랑 밥 같이 드실래요?
제가 한상 부러지게는 못해도, 금방 한 밥 한 공기에 생선 한 마리 굽고
뽀글뽀글 된장찌개 끓여서 따뜻한 집밥 한번 해 드릴게요.

오늘은 따뜻하고 포근한 집밥 같은 하루 보내시길 제가 항상 응원합니다. ^^

새로운 시작, 새로운 희망

오랜만에 인사를 드리네요

다들 잘 지내셨지요. 저도 요즘 새로운 일거리를 찾으려고 여기저기 정신없이 다니고 있습니다.

정단이라는 상호를 10년 넘게 사용했습니다. 깨끗할정(淨) 아침단(旦)이 정단의 한자 입니다. 퇴직후 처음으로 시작한 일이 일본식 화로구이 였습니다. 가게 이름을 만들때 한참 일본식 주점과 식당이 유행하던 시기라 한자를 사용해서 살짝 일본스럽게 지었었습니다.

제가 새로 시작하는 일의 상호는 Mirror and Compass입니다. 이름처럼 사람들에게 거울과 나침반을 만들어주는 일입니다. 낙서하듯 남기 하루의 기록이 지나 나의 거울이 되고 그 거울을 살펴보면서 미래를 준비할 나침판을 준비합니다. 좀 더 편안하게 기록을 남길 수 있고, 그 기록을 잘 분석해서 좀 더 나은 곳으로 발전하는 게 저의 새로운 일입니다.

이걸 하려고 요즘은 여기저기 찾아다니면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도 만나고 새로운 일도 하고 새로운 경험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이런 글들이 눈에 많이 들어오네요.

도전과 성공, 그리고 그 이후의 삶에 대한 고찰

위앙의 비극적인 이야기

위양은 전국시대 중기 위나라의 공자로서 공손앙이라고 하며, 진나라에서 변법을 성공적으로 단행하여 상군에 봉해진 인물입니다. 진나라의 왕인 효공이 현명한 선비를 구한다는 말에 효공을 찾아가 여러 가지 일들을 하게 됩니다. 태어난 곳은 위나라였지만 힘쓴 곳은 진나라였고, 훗날 죽임을 당한 곳도 진나라였습니다. 위앙을 죽인 사람들은 결국 진나라 사람들이었습니다.

중국의 전국시대에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했습니다. 이를 보면 나를 알아주는 곳이라면 어디든 몸을 위탁하고 힘을 쓰는 시대였던 것 같습니다.

위앙은 진나라에서 여러 가지 개혁적인 일들을 시행합니다. 그 법을 시행함에 있어서는 번개보다 빨랐고, 기존의 관행을 타파하기 위해 신분이 높은 사람일지라도 법대로 시행하며 한 치의 소홀함도 없었습니다.

그 결과, 진나라는 주변 어느 나라보다 백성이 안정되고 군사력은 강해졌으며, 위앙 스스로도 높은 자리로 올라가게 됩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부작용이 따릅니다. 개혁적인 정책을 펼치다 보니 기존 권력층으로부터 시기와 처단해야 할 대상으로 지목되었고, 그는 생존을 위해 주변을 호위병으로 둘러싸야만 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다 보니 어느 누구의 조언도 받아들이지 못했고, 결국 진나라 효공이 죽고 태자가 즉위하자 태자를 따르던 세력에 의해 반란군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죽기 전 도망치다가 한 여관에 투숙하려 했으나, 여관 주인이 와서 "여행증이 없는 사람은 투숙할 수 없고, 손님을 받아주면 연좌제로 처벌받는다."고 하며 그를 쫓아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법을 만든 사람이 바로 위앙 자신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태어난 위나라로 가려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주변 다른 나라로도 갈 수 없어 다시 진나라로 추방당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태어난 곳은 위나라였으나 그곳에서 인정받지 못해 진나라로 의탁했고, 그곳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진나라를 위한 모든 일들이 주변 나라들에게는 의로운 일이 아니었기에 결국 위기에 처하자 살아날 방법이 없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잃은 자는 망한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나의 업적과 상관없이 결국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 정답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이야기를 보면 먹고 산다는 것은 참 힘든 일입니다. 먹고 사는 것이 힘들어 더 큰일을 도모해 성과를 내니, 이제는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봐야 하고, 그들의 마음을 살피지 못하면 훗날 나의 입지도 헤아릴 수 없는 걸 보면…

단순히 경제적으로 풍족해지는 것도,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것도, 조심하고 삼가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 또한 이룬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아직 이루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고민조차 사치일 수 있습니다.

오늘은 더 나은 내일을 만들기 위해 새로운 도전과 새로운 실패, 그리고 성공이 함께하는 날이 되시길 바랍니다. 험난한 도전의 길이 참 즐거우시길, 제가 항상 응원합니다. ^^

통달로 가는 길, 소문 대신 진실된 관계를

반복해서 읽게 되는 글

한번씩 글을 읽다 보면 여러 번 반복해서 읽게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책의 내용이 어려워서 그런 것도 있고, 내 삶 속에서 잘 적용이 안 돼서 그런 것도 있고, 내 생각과 다르기 때문에 몇 번씩 보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번역을 좀 더 잘해 줬으면 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 원문을 보고 이해하는 것만큼 좋은 게 없습니다. 아마도 어려운 글을 몇 번씩 곱씹으면서 얻게 되는 나의 생각들이 좋은 것이기 때문일 겁니다.

이 글이 딱 그렇습니다. 글도 어렵고, 뭔가를 알 것 같긴 한데, 이걸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답은 잘 나오지 않고, 그렇지만 뭔가 대단한 글인 것 같기도 하고… 이렇게 몇 번을 읽고 필사를 했는데도 잘 모르겠습니다.

물건을 판매하려고 소문을 내고는 싶지만, 아무나 와서 정신없는 건 싫고, 좋은 사람들이 모여서 이 사람들끼리 재밌게 지냈으면 좋겠고… 딱 이렇게 지내고 싶은 내 마음속의 내용이 이 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은 소문이 아닌, 통달한 하루 되시길.
그래서 즐거운 분들과 좋은 시간 보내는 하루 되시길
제가 응원합니다. ^^

지금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

동양에서는 겸손을 미덕으로 이야기합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고,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배움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말을 삼가고 몸을 낮춰 조심하라고 합니다.

동양 사상의 겸손에 관한 철학에는, 높이 올랐다가 낮은 곳으로 떨어졌을 때 나의 입지를 다지기 위한 하나의 처세술인 경우도 있습니다. 잘나갈 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설쳤다가 낮아졌을 때 주변 사람들로부터 도움이 아닌 멸시를 받을지도 모르기에 항상 몸가짐을 조심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처세술의 이유가 아니더라도,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기에 주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려면 신분과 가진 것의 차이를 넘어 나와 생각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많아야 합니다. 그 사람들과 같이하려면 겸손의 미덕이 필요하기에, 동양 사상에서는 겸손이 항상 강조되어 왔습니다.

반대로 서양 사상에서는 내가 잘하는 걸 못한다고 하는 것이 겸손하지 못하다고 합니다. 할 수 있는 걸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못하는 걸 못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서양에서는 미덕이라고 합니다.

손자병법은 군사에 관한 두 사람의 병서를 묶어서 이야기합니다. 손자의 병법인 「손자」, 오기의 병법인 「오기병법」, 이 두 가지를 합쳐 「손자병법」 이라고 합니다.

무협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숨겨진 전설의 병법서를 찾으려고 사투를 벌이는데, 찾아보면 그게 바로 손자병법입니다. 이 병법서만 있으면 무적이 되는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손자는 발목이 잘리고, 오기는 자신의 군주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이런 전설적인 병법서를 적은 사람들도 정작 자신의 앞날은 보지 못하고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뭐든 완벽한 사람은 없나 봅니다.

사람은 각자의 역할과 자리가 정해져 있나 봅니다. 말을 잘하는 사람은 말을 잘할 수 있는 자리, 행동이 빠른 사람은 행동할 수 있는 자리. 리더는 사람을 때와 장소에 맞게 잘 사용할 줄 알아야 하고, 나 또한 내가 있을 자리를 잘 판단할 수 있어야 편안해지는 것 같습니다.

지금 내가 있는 자리가 꽃자리입니다.
오늘도 지금 나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하루가 되시길,
제가 항상 응원합니다. ^^

뒷담화도 예의와 인간애로

도서관에서의 발견

얼마 전에 도서관을 다녀왔습니다. 너무 학습서 같은 딱딱한 내용의 책들을 많이 보다 보니 몸도 마음도 딱딱해지기도 하고, 필사하기도 부담스러워서 조금 말랑한 책들을 찾으러 다녀왔습니다.

수많은 책들 속을 돌아다니다가 문학작품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한참을 서성거렸는데, 사기열전이라는 책이 눈에 보였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꺼내서 읽었는데, 입에 잘 달라붙지도 않는 사람 이름들과 옛날 중국의 나라 이름이 나오는 것이 꼭 삼국지를 읽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 한참 재미있게 보는 중입니다.

그중에서 공자와 그의 제자 이야기가 있는데, 한 편이 눈에 들어와서 한참을 두고 봤습니다.

이 내용의 전체적인 이야기는 예와 의를 다해서 사람을 대해야 하고, "인"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고, "지혜로움"은 "사람을 아는 것"이라는 말이었습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제가 수많은 책과 영상에서 보고 들었던 내용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건 변하지 않는가 봅니다.

이런 내용과 상관없이 내가 한 가지 깨달은 건, 공자도 사람이 없는 곳에선 다른 사람과 뒷담화를 한다는 것입니다. 『사피엔스』를 보면, 호모 사피엔스가 이렇게 번성한 이유 중 하나가 뒷담화 때문이라고 나오는데, 4대 성인 중 한 사람인 공자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공자도 하는 뒷담화, 하실 일이 있으면 시원하게 하시고요. 이왕 하는 뒷담화라면 좋은 이야기가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승리하는 하루 되시길 제가 응원합니다.

지나간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는 순간

제 머릿속의 함바집

제 머릿속의 함바집은 진짜 맛있는 밥집입니다. 그래서 함바집 분위기가 나는 식당들을 보면 꼭 한 번씩 들어가 보는 편입니다.

대학교 1학년 첫 여름방학이었습니다. 친구들끼리 방학 때 노가다라도 해서 학비를 벌어야겠다는 이야기를 참 많이 했습니다. 하루는 집에 있는데 친구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부산 용당에 공장을 건설하는데 그곳에 전기 설비를 하러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당시 아르바이트 시급이 1,300원이었으니 하루 종일 일해도 12만 원 벌기 힘들었는데, 하루 일당 56만 원 정도 준다고 하니 마다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친구들과 약속 장소에 나가니 현장으로 들어가는 차가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그 차를 타고 현장의 간이 사무실에 들어가니 파트를 나눠서 따라가라고 합니다. 하는 일은 간단했습니다. 현장에 들어가는 두껍고 긴 전기선을 한쪽에서는 밀고 한쪽에서 당기면서 필요한 자리에 잘 설치하는 일이었습니다.

정신없이 일을 하다 보니 점심시간이라고 밥 먹으러 가자고 합니다. 공사 현장에서 차로 5분 정도 이동하니 간이 식당이 나옵니다. 배식대가 있고, 사람들이 식판에 음식을 덜어 밥을 먹었고, 테이블에는 고추장 한 통이 올라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식욕이 왕성하지 않을 때라 소식자처럼 밥을 먹었었는데, 다른 사람들 식판을 보면 산처럼 음식을 쌓아 와서 고추장에 밥을 비벼 먹었습니다. 저는 매운 걸 싫어해서 빨간색 음식은 대체로 잘 건드리지 않는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고추장에 밥을 비벼 먹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다른 사람들 따라 고추장에 밥을 비벼 먹었었습니다.

다른 노가다 일처럼 그렇게 힘을 많이 쓰는 일은 아닌지라, 육체노동이 심하진 않았는데도 그렇게 먹는 점심 한 끼가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처음 겪은 함바집의 모습입니다.

결혼하고 장인, 장모님을 모시고 구경을 다녀오면 "그때 여기가 어땠는데, 저기가 이랬는데" 하는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십니다. 저희 아버지, 어머니는 두 분 다 부산분이 아니셔서 그런지 이런 이야기를 잘 못 듣는데, 부산분이신 장인, 장모님을 모시고 다니면 이런 이야기를 참 많이 들었습니다.

언제부턴가 저도 어디를 가면 "그때 여기가 이랬는데, 저기가 저랬는데, 없어져서 아쉽다."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는 걸 보니 저도 나이를 먹나 봅니다.

"아무리 힘들었던 시절이라도 추억으로 만나면 아름답다." 라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경제 대공황, 그 어렵던 시절을 지나온 사람들도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가 재밌었다"고 이야기하는 걸 보면, 이 말이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명절에 큰형 내외와 예쁜 커피숍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큰형이랑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편입니다. 이제는 앞니가 빠져서 틀니를 해야 한다는 큰형의 모습을 보니 앞으로 같이 먹을 끼니 수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다시 볼 수도 없는 어린 시절의 함바집처럼, 사라져 가는 것들이 아쉬워지는 걸 보면, 아무렇지 않게 보낸 시간들이 참 소중한 시간들이었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지나면 소중한 추억이 되는 시간을, 오늘도 따뜻한 기억으로 잘 만들어 가셨으면 합니다. 제가 항상 응원합니다. ^^

밥 한 끼의 의미와 따뜻함

생일 초대와 그리움

어렸을 적 생일이 되면 반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했었습니다. 초대하는 선별 기준은 없었습니다.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내 생일인데 우리 집에 놀러 올래." 이렇게 한마디 하는 게 전부였습니다. 그때 당시 한 반에 60명이 넘었는데 초대로 우리 집에 온 아이들이 20명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였으니, 국민학교 2학년까지는 그렇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초대를 하면 엄마가 생일상을 차려 주십니다. 밥상 위에 어떤 음식이 있었고 무엇을 하고 놀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그 당시 막내아들 생일상 차려 주신다고 저희 어머니는 고생하셨을 것 같습니다.

저희 집 공주들을 보니 요즘은 생일파티를 한다고 집으로 부르는 경우는 없더라고요. 대부분 빕스 같은 패밀리 레스토랑에 소규모의 사람들만 불러서 밥 먹고, 노래방 가고, 보드게임방 가서 놀다가 집으로 돌아옵니다. 한 반에 친구 수가 줄어든 것도 있겠지만, 이제 집으로 사람을 초대한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 되어 버린 이유인 것 같기도 합니다.

풀무원에 입사를 하고 기장의 한 유리공장 구내식당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위탁을 받아 다른 회사 구내식당에서 일을 하다 보니 저의 소속은 항상 "을"이었고, "갑"의 눈치를 보면서 일을 했습니다. 회사마다 식당 담당자가 있는데 그 담당자의 성향에 따라 일이 편해지기도 하고 힘들어지기도 합니다. 기장의 유리공장은 이 담당자가 좀 까다로운 편이었습니다.

내 회사 상사에게는 꼿꼿하게 해도 이상하게 "갑"사 담당자 앞에서는 굽실거리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나이가 어려서 처세술이 어떤 건지 몰랐던 것 같기도 하고, 발령받은 첫날부터 식당 담당자의 위엄을 극도로 높여 이야기한 저희 회사 부장의 말에 선입견이 생긴 것 같기도 합니다.

기장의 흙시루라는 한정식집이 있습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 지역에서는 꽤 유명한 한정식집이었습니다. 식당 담당자와 회식을 할 일이 있으면 꼭 그 식당을 예약해서 식당 식구들과 가는데, 그 자리가 그렇게 불편할 수가 없었습니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한상 부러지게 나오는 음식들 맛을 한 번씩은 다 먹어봐야 하는데, 그 "갑"사 담당자 한 명 때문에 음식에 손을 뻗을 수 없었습니다.

회식을 마치고 나오면서 남기고 온 음식을 제대로 못 먹은 것이 어찌나 아깝던지. 지금도 그때 못 먹고 온 계란지단 예쁘게 올라간 잡채가 눈에 아른아른합니다.

음식은 어떤 음식을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누구랑 먹느냐도 중요합니다. 수십만 원짜리 스테이크보다 편한 사람과 먹는 김밥 한 줄이 좋기도 하고, 대학 때 지옥문 들어가는 것 같았던 혼자 밥 먹으러 구내식당 들어가는 것이 이제는 혼자 밥 먹는 게 더 편한 걸 보면, 세상도 나도 참 많이 변했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래서 그런지 아무렇지 않게 하는 "언제 밥 한번 같이 먹자."는 말은 최고의 인사말인 듯합니다.

언제 저랑 밥 같이 드실래요?
제가 한상 부러지게는 못해도, 금방 한 밥 한 공기에 생선 한 마리 굽고
뽀글뽀글 된장찌개 끓여서 따뜻한 집밥 한번 해 드릴게요.

오늘은 따뜻하고 포근한 집밥 같은 하루 보내시길 제가 항상 응원합니다. ^^

잊었던 추억, 오늘의 따스함

호텔양식주방에서의 경험

호텔양식주방에 입사를 해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일이라기보다는 그 시절 저에게는 놀이터 같은 곳이 주방이었습니다. 내일 출근할 생각에 설레서 잠들었던 적은 그때가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이런 경험이 있었다는 것 자체로 그때는 참 열정이 넘쳤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출근을 하면 형들 뒤만 졸졸 따라다니면서 뒷치다꺼리도 하고, 몰래 몰래 음식하는 것도 배웁니다. 위생복 왼쪽 가슴 주머니에는 수첩과 볼펜이 항상 들어가 있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양식주방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넣고 다니는데, 필요할 때 수첩을 열어서 메모도 하고 레시피를 확인해서 음식을 만들기도 합니다. 작업대에 올려놓고 쓰다 보니 수첩 구석구석에는 양념들이 떨어져서 얼룩이 지어 있기도 합니다.

하루는 출근을 했더니 프렌치 드레싱을 만드는 법을 알려준다고 하면서 레시피를 열어서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레시피대로 만들어서 저보고 맛을 보라고 이야기합니다. 프렌치 드레싱은 기름 드레싱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올리브오일과 식초를 적당히 섞고, 기호에 맞게 설탕과 후추 그리고 야채 등을 다져서 넣고 잘 섞어서 만드는 드레싱인데, 야채나 생선과 같이 먹으면 상큼하게 먹기 좋은 드레싱입니다. 평생 보지도 듣지도 못한 음식을 맛보는데 이게 무슨 맛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냥 시큼하고 미끌거리는 느낌이 익숙하지 않은 맛이라 맛있다 맛없다 말도 못 하고 멍하니 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낯선 음식들은 원래 그 음식들의 맛이 어떤 건지 모르기에 맛있다 맛없다는 표현 자체가 불가능했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익숙해지면 내 기호에 맞는 음식들로 만들어 변해 갑니다.

호텔에서 풀무원으로 이직을 하면서 한식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낯선 음식들이 아닌 익숙한 음식들을 만듭니다. 한식처럼 익숙한 음식들은 사람들 머릿속에 그 맛의 기준이 다 정확하게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아니면 장소가 바뀌어서 그런지, 이것 아니면 음식의 가격이 바뀌어서 그런지 호텔에서 음식을 준비할 때보다 훨씬 더 긴장을 하고 만듭니다. 이게 어떤 맛이지에 대한 궁금증을 가진 사람들이 아닌, 정확하게 답을 찾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준비하는 건 그만큼 저에게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음식을 만들려면 음식을 하는 사람들 머릿속에 맛에 대한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기준이 필요할 때면 어렸을 적 맛있게 먹었던 음식들이 기준이 됩니다. 엄마가 도시락으로 싸주셨던 반찬들부터 장모님이 해주시던 우럭생선조림, 중학교 때 학교 마치고 나와서 먹었던 쫄면올라가있는 궁중 떡볶이, 대학 때 처음 먹었던 뼈다귀 해장국, 돈 없는 친구들이 즐겨 갔던 실비집 계란말이, 호텔 마치고 형들이랑 갔던 연기 뿌옇던 꼬치집 등등… 메뉴에 이런 것들이 등장할 때마다 그때의 맛을 더듬어 가면서 만듭니다. 손님으로 갈 때는 그냥 맛있으면 끝이 나지만, 이걸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연구 분석이 필요해 그 집들을 다시 찾아가서 먹어 봐야 할 때가 있습니다.

졸업한 지 한참이 지난 중학교 때 궁중 떡볶이 집은 간판이 없어져 버렸고, 돈 없던 친구들과 같이 갔던 실비집은 업종이 변경이 되어 있고, 꼬치집도 사라지고 없고 남아 있는 곳은 뼈다귀 해장국 하나만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사장님은 바뀌었지만, 그래도 이렇게라도 갈 수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에 제가 다니던 대학교 앞을 지나간 적이 있습니다. 대학 때부터 직장과 학교를 같이 다니고 있었기에 친구들과 학교 앞에서 많이 놀지는 못했지만, 친구들과 막걸리 나눠 마시던 집들도 다 없어지고 길도 새로 나서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아이들 데리고 “아빠 대학 때 이런 곳에서 놀았었어.”라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시대가 변하고 세상이 변하면서 어릴 적 갔던 단골집들이 사라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 시절 같이 했던 추억들도 사라지는 것 같아 참 아쉽습니다. 책에서만 나오는 부모의 그 시절 추억이 자식들의 추억에도 이어지고, 그 시절 젊었던 사장님이 시간이 지나도 노쇠한 몸으로 자식과 함께 같이 반길 수 있는 그런 집들이 있으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나이를 먹는지 이런 생각들이 오늘은 드네요. 오늘은 잊었던 추억을 찾아보십시오. 그 추억들이 오늘 하루를 참 따뜻하고 포근하게 만들어 주길 제가 항상 응원합니다. ^^

변화를 받아들이며 성장하는 하루

직장생활 이야기: S&T대우 구내식당 이야기

제가 마지막으로 직장생활을 했던 곳은 부산과 양산 경계에 위치한 S&T대우의 구내식당입니다. 풀무원이 이곳 구내식당을 위탁 운영하게 되면서 제가 주방 책임자로 발령받았습니다. 이곳은 하루에 조식, 중식, 석식, 야식을 포함해 총 4끼 식사를 제공하며, 중식과 석식 사이에는 간식도 제공되는 곳이었습니다. 당시 한 끼 식사비용은 2,150원이었고, 일일 식수는 약 2,000명에 달했습니다. 그때 짜장면 한 그릇이 4,500원에서 5,000원이었으니, 한 끼 식사비용이 짜장면 한 그릇보다 저렴했던 셈입니다.

대부분의 구내식당이 그러하듯, 안정적인 식수를 확보하고 박리다매를 통해 수익을 맞추는 구조였습니다. 처음 발령을 받고 제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시스템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식수가 많아질수록 조리사 한 명의 역량만으로는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적은 인원이더라도 동료들과 분업을 잘하고 협업해야 시간 내 배식을 마칠 수 있습니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는 말처럼, 식수가 많아지면 매일매일이 사건의 연속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제때 밥 스위치를 누르는 것을 잊어 짧은 배식시간에 밥이 끊겨 배식이 중단되기도 하고, 준비한 반찬이 부족해져 대체찬을 항상 준비해야 하기도 했습니다. 신기하게도 그런 날은 꼭 사장님이나 회장님이 식사하러 배식대 앞에 서 계시고, 그럴 때면 심장이 쫄깃쫄깃하게 멎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런 일을 겪고 나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없던 일을 만들어 해야 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이미 많은 일에 일거리까지 늘어나면 스트레스가 극도로 쌓여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지곤 했습니다. 매번 주방 식구들에게 “사고 치면 일이 늘어나니 사고 치지 말자”고 당부했었는데, 퇴사할 때쯤 깨달았습니다. 내 스스로 일을 늘리는 것이 일을 줄이는 방법이였습니다.

스스로 일을 만들어 할 때 나의 역량이 커지고, 역량이 커지면 외부에서 오는 요청과 지시가 줄어들어 일이 더 편해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일을 줄이는 방법이 일을 늘리는 것이었던 셈입니다.

세상은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계속 변합니다. 과거에 성공했던 방법이 지금은 실패의 이유가 되기도 하고, 반대의 경우도 생깁니다. 이런 변화를 경험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안정적인 상태를 바라는 걸 보면 저 역시 천성이 부지런한 사람은 아닌가 봅니다.

오늘은 변화가 무섭지 않고, 편안한 일이 되시길 제가 항상 응원합니다.